1962년 부산 피란 시절 인연을 맺었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으며, 결혼 이후에도 여성문제연구원 회장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지속했습니다.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낙선하며 일약 야권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,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.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(1972년), 납치사건(1973년), 가택연금과 투옥(1973∼1979년) 등을 당하는 등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습니다.
특히 1976년 김대중·문익환·윤보선·함세웅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박정희 유신정권(유신체제)을 비판한 3·1민주구국선언 사건 직후 이 여사는 남편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. 이후 남편 김대중이 투옥 생활을 이어가는 시기 내내 재야인사의 부인들과 함께 석방운동을 벌였습니다.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종말 이후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을 받았는데, 특히 1980년 5월 내란음모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이 여사는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적 구명 운동에 앞장섰습니다. 김 전 대통령은 석방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귀국 후에도 가택연금(1982∼1987년) 등 탄압의 연속이었으나,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견뎠습니다.
1962년 부산 피란 시절 인연을 맺었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으며, 결혼 이후에도 여성문제연구원 회장을 지내며 여성운동을 지속했습니다.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낙선하며 일약 야권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,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닥치게 되었습니다.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(1972년), 납치사건(1973년), 가택연금과 투옥(1973∼1979년) 등을 당하는 등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습니다.
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고, 이 여사는 이후에도 재야와 동교동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역할을 했다. 특히 2009년 9월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해,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,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습니다. 이에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방북해 조문했고, 2015년 8월에는 각계 인사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물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.